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는 스페인 회화사에서 근대의 문을 연 예술가로 평가됩니다. 그는 궁정화가로 시작했지만, 전쟁, 부패, 광기, 죽음 등 인간 존재의 어두운 면을 사실적이고 직설적인 화풍으로 그려내며, 단순한 미술을 넘어 사회적 고발과 비판의 도구로 회화를 활용했습니다. 본 글에서는 「1808년 5월 3일」, 「카프리초스」, 「검은 그림들」을 중심으로 고야 예술의 사회비판적 성격을 심층 분석합니다.
저항의 총성, 1808년 5월 3일
고야의 대표작 「1808년 5월 3일(The Third of May 1808, 1814)」은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과 그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 그리고 프랑스 군의 학살을 묘사한 회화입니다. 작품은 마드리드 시민들이 총살되는 장면을 담고 있으며, 한 남성이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모습이 중심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 남성은 흰 셔츠를 입고 있어 화면에서 가장 눈에 띄며, 그의 얼굴은 공포와 체념, 저항의 감정이 교차한 복합적인 표정을 보여줍니다. 총을 든 프랑스 군인들은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등진 채 그려져 있어 비인격적 폭력을 상징합니다. 배경의 어두운 하늘과 희생자들의 피는 극적 대비를 이루며, 고야 특유의 극명한 명암 표현이 감정의 깊이를 증폭시킵니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역사화와 달리, 영웅이 아닌 ‘희생자’를 중심에 둡니다. 이를 통해 고야는 전쟁의 참혹함과 인간성의 파괴를 고발하며, 회화를 ‘윤리적 증언의 도구’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이후 피카소의 「게르니카」, 제라드 리히터의 「10월 18일 시리즈」 등 많은 현대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풍자의 칼날, 카프리초스
「카프리초스(Los Caprichos, 1797–1799)」는 고야가 제작한 80점의 에칭 판화 연작으로, 스페인 사회의 위선과 종교적 맹신, 귀족의 타락, 대중의 어리석음을 강렬하게 풍자합니다. 이 작품들은 고야가 왕실 화가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익명으로 출간했으며, 당시 검열과 정치적 억압에 대한 대응으로 해석됩니다.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El sueño de la razón produce monstruos)」는 책상에서 잠든 인간 뒤로 박쥐, 부엉이, 고양이 같은 존재들이 몰려드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이 이미지에서 고야는 ‘이성이 잠들면, 무지와 광기가 지배하게 된다’는 계몽주의적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각 작품은 풍자적이면서도 은유가 가득하며, 고야는 단순한 비판을 넘어 인간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제기합니다. 종교재판, 부패한 귀족, 가면을 쓴 인간 군상 등은 고야가 본 시대의 진실이었습니다. 카프리초스는 오늘날에도 검열, 정치 풍자, 표현의 자유 문제와 관련하여 끊임없이 회자되는 예술적 성찰입니다.
광기의 암흑, 검은 그림들
「검은 그림들(Las Pinturas Negras, c. 1819–1823)」은 고야의 말년 저택인 '청각의 집(Quinta del Sordo)'의 벽에 직접 그린 14점의 프레스코 벽화 시리즈입니다. 이 시리즈는 당시 고야가 청각을 상실하고 정치적 탄압과 내전 속에서 정신적 고통을 겪던 시기에 탄생했으며, 극도의 절망과 인간 본성의 파괴를 보여줍니다.
대표작 「사투르누스가 아들을 삼키다(Saturno devorando a su hijo)」는 그리스 신화의 장면을 차용하되, 괴기스럽고 야만적인 형상으로 재해석했습니다. 사투르누스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피에 젖은 아들의 시체를 물고 있으며, 화면 전체는 칠흑 같은 어둠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고야는 이 장면을 통해 권력의 광기, 세대 간 폭력, 인간 내면의 야만성을 고발합니다.
검은 그림들은 원래 대중에 공개되지 않았으며, 고야의 내면과 시대적 절망이 응축된 ‘내밀한 예술’이자 ‘비공식 역사화’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미화도, 설명도, 구원도 없습니다. 오직 절대적인 침묵과 공포만이 존재합니다. 고야는 이를 통해 근대 예술이 감추어진 현실과 인간 본능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는지를 선취한 셈입니다.
고야는 예술을 통해 시대를 기록하고, 권력을 감시하며, 인간의 본질을 폭로한 화가였습니다. 「1808년 5월 3일」에서는 전쟁의 비극을, 「카프리초스」에서는 사회의 위선을, 「검은 그림들」에서는 인간 내면의 광기를 직면하게 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단지 시각적 아름다움이 아닌 윤리적 통찰과 저항의 언어였습니다. 오늘날에도 고야의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며, 예술이 진실을 직면할 수 있는 방법임을 그의 그림은 증명합니다. 이제, 고야를 통해 당신의 시대를 다시 바라보시길 바랍니다.